"아버지, 저 배들이 왜구인가요?"
1340년경, 15세 소년 최무선이 물었다.
바다 멀리 왜구 선박들이 보였고, 해안 마을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백성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최무선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저놈들이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다."
최무선은 주먹을 쥐었다. 고려는 왜구의 침입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해안 마을은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고려 수군은 왜구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최무선은 그날 생각했다.
'왜구를 물리칠 방법은 없을까? 저들의 배를 불태울 수 있다면...'

그리고 40년 후, 이 중인 집안의 소년은 화약을 개발해 고려를 구한 과학자가 되었고, 1380년 진포대첩에서 왜구 선박 500척을 불태워 격퇴했으며, 조선 시대 화기 기술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중인이라는 신분 제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화약 연구에 평생을 바쳐 나라를 구한 과학자의 이야기다.
1. "왜구가 또 왔다" - 10세, 전쟁의 공포
1335년경, 최무선 10세.
영천(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중인 계층의 기술관료였다.
중인은 양반과 평민 사이 계층으로 의학, 천문, 통역, 기술 분야에서 일했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었고,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최무선의 어린 시절, 고려 최대의 위협은 왜구였다.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는 고려 해안을 끊임없이 침략했고,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백성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고려 조정은 속수무책이었고, 육지에서는 군사를 보내도 바다에서 오는 왜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최무선은 피난 온 사람들을 봤다.
해안 마을에서 왜구의 습격을 피해 온 사람들이었고, 온몸에 상처를 입었으며,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한 노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왜구 놈들이... 우리 마을을 다 불태웠소. 배를 타고 와서 칼을 휘두르고..."
최무선이 물었다.
"할아버지, 우리 군사들은 왜 왜구를 막지 못하나요?"
"배가 없어서 그렇지. 왜구는 바다에서 오는데, 우리는 바다에서 싸울 방법이 없단다."
최무선은 그날 생각했다. '바다에서 싸울 방법... 왜구의 배를 부술 수 있다면...'
2. 10대 후반, "화약이라는 것이 있다던데" - 호기심의 시작
1345년경, 최무선 20세.
중인 집안의 청년으로 자랐고, 아버지처럼 기술관료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최무선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왜구를 막을 방법, 특히 바다에서 왜구 선박을 공격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이때 최무선은 중국 원나라에서 사용하는 "화약"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불을 일으키는 가루로 만든 무기가 있다는 것이었고, 돌을 날리거나 불을 뿜는 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했으며, 최무선은 이것에 매료되었다.
'화약... 그것으로 왜구 배를 불태울 수 있을까?'
최무선은 화약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국 상인들을 만나 물어봤고, 원나라를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었으며, 화약이 황(유황), 초석(질산칼륨), 숯을 섞어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배합 비율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중국은 화약 기술을 비밀로 지켰으며, 최무선은 스스로 연구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무선아, 중인 주제에 무슨 화약 연구냐. 그런 건 나라에서 할 일이지."
"하지만 나라에서는 안 하잖아요. 왜구는 계속 오는데."
"네가 한다고 될 일이냐?"
최무선은 대답했다.
"해봐야 알죠. 안 해보고 포기할 순 없어요."
3. 30대, "몇 년을 해도 안 되는데" - 실패의 연속
1355년경, 최무선 30세.
10년 넘게 화약 연구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유황과 초석과 숯을 섞었지만 제대로 폭발하지 않았고, 비율을 바꿔가며 수백 번 실험했지만 실패만 거듭했으며, 돈도 많이 들어서 가산을 탕진할 지경이었다.
가족들이 걱정했다.
"무선아, 이제 그만하고 제대로 된 일을 해라. 화약 연구로는 밥 먹고 살 수 없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요."
"10년 넘게 그 소리만 하잖아! 언제까지 실패만 할 거냐?"
최무선도 좌절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걸까? 중국인도 아닌데, 중인 신분인데...'
1360년경, 최무선 35세.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왜구는 계속 고려를 침략했고, 백성들은 계속 죽어갔으며, 최무선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중국 원나라에서 온 상인을 만났고, 거금을 주고 화약 제조 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지만, 상인은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최무선은 스스로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고, 실험실(집 뒤뜰)에서 매일 배합을 바꿔가며 시도했다.
1370년경, 최무선 45세.
드디어 성공했다! 정확한 배합 비율을 찾아냈고, 화약이 제대로 폭발했으며, 최무선은 기뻐서 소리쳤다.
"됐다! 드디어 됐어!"
25년간의 연구 끝에 화약 제조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제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었고,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4. 50대, "화약으로 왜구를 물리치겠습니다" - 화통도감 설치
1374년, 최무선 49세.
고려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신이 화약 제조법을 개발했습니다. 이것으로 화포를 만들면 왜구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의심했다.
"중인 주제에 무슨 화약이냐?"
"정말 왜구를 물리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왜구의 침입이 너무 심각했기에, 우왕과 이성계 등이 최무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377년, 최무선 52세.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었다. 화약과 화기를 제조하는 국가 기관이었고, 최무선이 책임자가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화포와 총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무선은 여러 종류의 화기를 개발했다. 화살을 발사하는 주화(走火), 돌을 날리는 포(砲), 화약을 터뜨리는 화포 등을 만들었고, 특히 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기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1380년 8월, 진포 해전.
왜구 선박 500척이 진포(지금의 전북 군산)에 침입했다.
고려 수군은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무장하고 출격했고, 이성계와 심덕부가 지휘했으며, 최무선도 직접 참전했다.
전투가 시작되었고, 고려 수군이 화포를 발사했다.
불을 뿜는 화포가 왜구 선박을 강타했고, 나무 배들이 불타기 시작했으며, 왜구들은 공포에 떨었다.
"불이다! 배가 불탄다!"
왜구 선박 500척 중 대부분이 불타 침몰했고, 왜구는 참패했으며, 고려는 대승을 거두었다.
55세 최무선은 25년간 연구한 화약으로 조국을 구했다.
5. 말년, "중인이지만 나라를 구했다" - 1395년 생을 마감
1380년 진포대첩 이후 최무선은 계속 화기를 개발했다.
화포 기술을 발전시켰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화약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1395년, 최무선은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중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화약 개발로 나라를 구한 과학자였고, 조선 시대 화기 기술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었다.
🌸 결론: 신분의 한계를 과학으로 극복한 애국자
최무선의 어린 시절은 왜구의 공포 속에서 자랐다.
10세에 왜구의 침입을 목격했고, 15세에 피난민들의 고통을 봤으며, 20세에 "왜구를 막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해."
30세 청년이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최무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20세부터 화약 연구를 시작했고, 25년간 실패를 거듭했으며, 45세에 드디어 성공했고, 52세에 화통도감 책임자가 되었으며, 55세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중인이라는 신분 제약이 있었지만, 과학 기술로 나라를 구했고, 조선 시대 화기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최무선이 남긴 것은 화약만이 아니었다.
"신분보다 능력이 중요하다."
"25년 실패해도 포기하지 마라."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끝까지 하라."
이것이 최무선이 보여준 삶이었다.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신분의 한계가 있었지만, 화약 연구에 평생을 바쳐 왜구를 물리쳤고, 고려를 구한 과학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중인 집안의 소년에서 고려를 구한 화약 과학자로. 25년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진포대첩의 영웅이 된 최무선으로.
이것이 최무선이 걸어온 길이고, 어린 시절의 왜구 목격이 만든 과학자의 이야기다.
참고문헌 및 출처
주요 사료
- 고려사 최무선 열전
- 조선왕조실록
참고 서적
- 이종호, 최무선 평전, 살림, 2007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사, 2012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 화약무기 발달사, 2015
학술 논문
- 김태준, "최무선의 화약 개발과 진포대첩", 군사연구
- 박재광, "고려 말 화기 도입과 최무선의 역할", 한국사연구
- 노영구, "14세기 동아시아 화약 기술과 고려", 역사학보
관련 기관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국립진주박물관
- 한국과학기술한림원
※ 본 글은 고려사, 관련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1325년 출생, 1377년 화통도감 설치, 1380년 진포대첩, 1395년 사망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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